포클랜드 전쟁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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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8. 30. 23:18
포클랜드 전쟁을 아시나요?
오늘은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포클랜드섬
포클랜드는 남아메리카의 남단(서경 57도, 남위 50도)에 위치한 섬으로서, 전쟁의 당사국이었던 아르헨티나로부터는 670km, 영국으로부터는 12,83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포클랜드는 동포클랜드와 서포클랜드라는 커다란 두 개의 섬과 그 주변에 샌드위치섬을 비롯한 220여 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도니 군도이다.
이 섬의 총 면적은 11,718평방 킬로미터로서 전라남도의 면적과 비슷하다. 인구는 당시 약 1,800명으로 98%가 영국계였으며, 언어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장 큰 도시는 동포클랜드에 위치한 포트 스탠리로 약 1,0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민간인이 주거하는 지역은 포트 스탠, 폭스 베이, 구스그린, 산 카를로스 등으로 주로 해변에 산재되어 있었다.
기후는 남반구에 위치한 관계로 6~8월이 동계에 해당되며, 작전기간중 (1982. 4. 25~6. 14) 기온은 최저 섭씨 영하 6도로부터 최고 섭씨 영상 9도의 분포였다. 강풍과 누느 서리 및 습기 등에 의한 체감온도를 감안한다면, 극히 추운 날씨였으며, 주간과 야간, 지형의 고저차이에 따라 기온차가 심했다. 당시 일조시간은 일출이 08:30, 일몰이 17:00로 주간보다 야간이 길었다.
지형은 자갈, 진흙, 늪지대 등으로 형성된 야지가 대부분이어서 기동부대의 행군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었다. 산악지형은 대부분이 6부 능선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으나, 7부 능선부터는 급경사와 석영 암석지대로 형성되어 있어 비교적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으로 판단할 수 있다. 식물은 남대서양의 해양성 기후 및 통양의 여향으로 관목의 성장이 제한되어 광활한 초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2.전쟁의 배경과 원인
1)배경
포클랜드섬에 대한 영유권과 관련된 분쟁은 최초 1544년과 1592년에 각각 스페인 및 영국이 상호 먼저 발견했다는 주장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스페인의 계승권을 주장하여 영유권을 요구하게 되었고, 1823년에는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33년 영국해군이 상륙하여 섬에 거주하고 있던 아르헨티나인을 추방하고 1892년부터는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하였다.
이후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었고, 1964년 아르헨티나가 영유권 문제를 UN에 상정하여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여 1966년부터 양국간에 영유규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평화적 해경의 원칙에는 합의를 이루었으나,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강점한 불법적인 지배”임을 강조하였고, 영국은 “최초 발견한 이래 한번도 영유권을 포기한 적이 없는 합법적인 지배”임을 강조함으로써 영유권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해군함대 및 지상군 약 2,500명으로 포클랜드섬을 점령하게 되자, 이에 영국은 4월 5일 기동함대를 본토에서 출항시켜 대응함으로써 전쟁은 발발되었다.
2)원인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섬의 무력 점령의 원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침체와 실업자의 증가, 군부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 누적으로 심각한 국내문제가 야기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민들의 국내문제를 외부로 표출시킬 계기를 마련해야했고, 특히 1974년 영국이 발표한 포클랜드 지역 대륙붕 일대에 매장된 석유자원과 남극대륙의 전진기로서의 전략적 가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영국군은 섬에 80명의 수비대만 잔류시켰고, 항공모함 아크 로얄호의 퇴역으로 영국의 즉각적인 반응은 없으리라는 오판을 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아르헨티나의 남성우월주의 사고방식이 역국의 대처 수상을 과소평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아르헨티나로 하여금 오판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국은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섬을 점령하게 되자, 대영제국의 명예와 위신에 대한 심각한 모욕감과 포클랜드섬의 포기로 야기될 키프로스섬과 같은 여타의 관할지역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제 2차대전 이후 가장 대규모의 함대를 파견하여 전쟁으로 대항하였다.
3.양국의 전쟁준비
1)양국 군사력 비교
구분 |
영국 기동함대 |
아르헨티나 |
함정 |
항모 2 / 경순양함 2 구축함 5 / 호위함7 상륙함 2 |
항모 1 / 구축함 8 호위함 3 / 잠수함 3 |
항공기 |
씨 해리어 37 씨 킹헬기 40 기 타 20 |
미라즈 21 수퍼 에땅달 12 스카이 호크 68 기 타 114 |
미사일 |
엑조세 28기 외 178기 어뢰 48 |
엑조세 5기 외 114기 어뢰 66 |
지상전투기 |
해병대, 공정대 등 9.000명 스콜피온 전차 1개 대대 레피어 SAM 1개 대대 |
수비대 12,000명 전차 15대 105미리 자주포, APC,SAM |
2)양국의 전략
영국은 포클랜드섬이 계절적으로 6~8월에 동계기간이 되므로 동계이전에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 보다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속전속결의 전략적 방침을 수립하였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영국군이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해야하기 때문에 전투근무지원상의 남점과 동계기후의 적응에 어려훔이 있으리라는 판단과 함께, 남미국가들의 정치,군사적 지원 및 각종 신형장비의 도입기간을 고려하여 장기 지구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3)영국군의 전투준비
영국국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를 점령한 지 불과 3일 만에 전투 병력을 본토로부터 출발시켜야 했기 때문에 포클랜드의 기후나 기상에 적응하여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적응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물론 기타 전투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실정이다.)
영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본토를 출발하는 1982년 4월 5일부터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직전까지 46일 동안 항해중인 함정에서 배 멀미와 추위를 견디어 가며 주, 야간 전투훈련을 실시하였다.
4)양국의 전투에 투입된 부대 및 규모
전투에 투입된 영국군은 기동부대지휘부 예하 5개 대대 4,500명에 불과하였으며, 제 5보병여단 예하의 3개 대대 규모의 4,500명은 전쟁이 종료되기 직전 포트 스탠리 공격시에 투입되었다.
아르헨티나군은 지상군사령부 예하 제3해병여단 미 제10보병여단 예하의 총 8개 연대 12,000여 명이 투입되었다. 해군과 공군은 아르헨티나 본토에 기지를 두고 출격, 지상군을 지원하였다.
4.포클랜드 전쟁의 경과
1) 아르헨티나의 선공과 영국의 전쟁선언
아르헨티나군은 영국에 대해 선수를 쳐서, 1982년 4월 2일 아침에 아르헨티나군 2500여명이 포클랜드의 포트 스탠리에 상륙하였다. 당시 포클랜드의 영국군은 84명의 해병대 밖에 없었으므로, 저항은 3시간 만에 종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르헨티나군 15명이 죽고 17명이 다쳤으나, 영국 수비대는 손실이 없었다. 항복한 수비대는 우루과이를 거쳐 영국으로 송환되었다. 이어서 4월 3일, 아르헨티나군은 남 조지아 섬에 상륙하였다. 조지아 섬의 영국 수비대는 22명뿐이었으나, 적에게 7시간동안 분전하여 3명 전사, 헬기 1대, 코르벳함 한 척을 손실 시켰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은 4월 3일 UN안보리를 개최시켜서 아르헨티나에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거절했기 때문에, 유럽공동체국가들의 군사·경제적 제제가 이어졌고, 미국도 지지하고 나서는 등, 영국에 유리하게 정세가 돌아갔다. 국내에서도 전쟁 지지 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대처 수상은 영국 원정함대에 출병을 허가했다. 이에 4월 5일 영국원정함대가 포츠머스를 출항했다. 4월 5일 영국원정함대는 경 항공모함 2척과 전함 28척으로 출항하였다. 대서양에서 합류한 구축함, 호위함, 보급선이 합세하여 60여 척의 함대를 형성했다. 영국은 4월 12일 포클랜드 주변의 해안봉쇄를 선언하였고, 4월 14일에 해병 1000여명과 항공기 20대가 증강되었다. 이 원정함대는 13000km되는 원정작전을 위해 아프리카 최서단에 있는 아센션 섬을 중간기항지와 전략폭격기의 비행장으로 활용하였다. 동시에, 상륙작전시 해군기지로 활용할 목적으로 포클랜드로부터 1610km 떨어진 남 조지아 섬에 1개 대대 규모로 특수임무부대를 투입하여 4월 25일 섬을 탈환하였다. 남 죠지아 섬에서는 아르헨티나 수비대는 2시간 만에 패배하였고, 영국군이 1명 다친데 비해, 156명이 포로가 되었고, 잠수함 1척을 잃었다.
2) 남대서양 해역의 싸움
5월 1일, 영국군은 6798km 떨어진 아센션섬의 기지에서 발칸 장거리 항속기를 이용하여 포트스탠리의 활주로를 공습했다. 3시간 후에는 항모전단에서 해리어기가 출격해 포트 스탠리의 공항과 구르스린의 잔디비행장을 폭격하였다. 동시에 영국 전함들이 공항과 연료저장소에 포격하여 포클랜드의 병참선을 차단하였다. 특히, 아르헨티나군은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략폭격기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 예상을 깨고 영국군은 공중급유기를 이용하여 발칸 장거리 항속기를 운용하여, 포트 스탠리의 활주로를 공습했다.
5월 3~4일 영국함대는 아르헨티나해군과 교전하였다. 3일 핵잠수함 컨쿼러호가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호를 격침시켰다. 4일에는 포클랜드 서쪽 70마일에 있던 HMS쉐필드호가 아르헨티나 항공기에 격침되었다. 5월 7일 영국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해상봉쇄를 확대하고, 5월 13일 서 포클랜드의 북쪽 페블 섬을 기습하였다. 그 섬에는 잔디 활주로와 11대 정도 항공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탄약집적소와 연료저장소 및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영국군은 페블 섬을 기습하기 위해, 11일 야간에 8명의 특공대를 파견하였다. 기상의 악화로 특공대는 13일에 상륙했다. 15일 밤, 48여명의 특수공정대원과 함포사격을 유도하기 위한 연락장교와 무선기사가 강습투하 되었다. 작전은 30분 만에 종결되었다. 페블 섬의 비행장과 배치된 항공기, 레이더 기지, 탄약 및 유류 집적소가 제거되었다.
3) 포클랜드 섬 공격
(1) 산 카를로스 상륙작전
5월 20일 영국원정함대는 포클랜드 섬의 산 카를로스 항구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그 항구는 겨우 120여명의 아르헨티나군이 방어하고 있었고, 다른 정박지와 달리 아르헨티나군의 대함미사일로부터 방호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 상륙전단은 원정함대를 떠나서 산 카를로스를 향해 항해하였다. 상륙전단은 강습용 상륙공격함 두 척에 탄 700여명의 해병과 공수요원들을 포함하여 영국 해병대와 제40,42,45 특공대, 제2,3공수대대 4500명을 보유했고, 이를 구축함과 호위함 40여척이 호위하였다. 이들이 접근하는 동안 항모전단의 해리어 전투기들은 포트 스탠리와 구스그린, 폭스 베이를 폭격하고, 전함들은 포트 스탠리를 집중포격 하였다. 이것은 적을 교란하기 위해서였다.
21일 새벽 4시에 상륙군은 16대의 상륙정에 올라 6시 30분경에 상륙해안으로 진격하였다. 이 사이에 아르헨티나군은 영국 항모전단과 공중전을 치루었다. 40여 차례 공습으로 영국 전함 한척을 폭파하였으나, 미라크기 9대, 스카이호크기 8대, 푸카라기 2대, 헬기 4대, 기타 8대의 항공기를 상실하였다. 상륙한 영국군은 보급품을 별로 준비하지 못했지만, 아르헨티나군이 36시간 동안 교두보를 공격하지 않아서, 영국군의 병참선은 차단되지 못했다.
5월 27일 교두보를 확보한 영국군은 포클랜드 섬에 대한 공세에 들어갔다. 아르헨티나군은 이 공세에서 영국군이 전통적인 협공방법을 사용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군은 영국군이 군을 둘로 나누어 산 카를로스에서 한 쪽은, 북쪽길로 가서 포트 스탠리 근처의 켄트산으로, 다른 한 쪽은 구스그린-다윈을 경유하여 포트 스탠리로 향할 것이라 판다하였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군은 프클랜드의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종심깊은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특히, 다윈·구스그린 지역에 병력을 집중배치 하였다(1개 연대). 영국군이 스탠리 항구를 공격할 때 후방위협이 가능한 위치였고, 비행장과 항만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다윈·구스그린 전투
아르헨티나군의 예상대로 영국군은 남북 양로로 진격해 들어왔다. 남쪽 루트의 다윈·구스그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의 아르헨티나 제 12연대는 그곳의 다윈 고지와 보카 고지 등 낮은 고지군을 의지하여 영국군을 저지하고 구스그린 비행장과 항만시설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아르헨티나군 제 12연대는 부근의 주요 고지군을 중심으로 6km에 걸친 종심다중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105밀리 1개 포대는 구스그린에서 화력을 지원하기로 계획했다. 5월 28일 2시를 기해, 영국군이 공격해 왔다. 영국군은 제2 공정대대가 선두로, 다윈고지를 탈취하고, 그 기세롤 구스그린 비행장과 항만을 탈취하려 했다.
영국군 2공정대대의 공격은 기상악화로 인해 함포사격 및 공중지원이 제한되어 고전하였다. 그러나, 대대 예비중대를 목표의 측방으로 투입하자, 방어진지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영국군은 다윈고지 등의 고지군을 확보하였다. 이어서 2개 중대를 구스그린 비행장의 후사면으로 공격시켜 구스그린을 포위하였다. 5월 29일 14시에 12연대가 항복하였다.
(3) 포트 스탠리 공략전
포트 스탠리로 향하는 길은 두 개가 있었는데, 이 길들은 롱돈 산, 자매 산, 해리엇 산 그리고 포트 스탠리를 둘러싼 텀블다운 산과 윌리엄 산 등이 감제하고 있었다. 즉, 포트 스탠리는 이런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이 장점을 살려서, 아르헨티나군은 2개 여단(-)으로 주요 고지군이 연결된 산악지형에 종심다중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축차방어하려 했다. 이 중에서 롱돈 산은 접근로 중 북로를 통제하기 제일 유리했다. 여기에 1개 중대의 전면방어 진지를 편성하고, 럼블다운 산은 암석과 바위지대를 이용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에 영국군은 1단계로써, 제 3코만도 여단이 롱돈 산과 자매 산, 해리엇 산을 공략하고, 그런 다음에 곧 도착할 증원군을 투입하여 텀블다운 산을 공격하고, 마지막으로 포트 스탠리 항구를 공략하기로 했다,
아르헨티나군 7연대의 1개 중대가 롱돈 산의 암석지대를 활용하여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주요 접근로에는 기관총 및 중화기 소대를 반 단위로 운용하여, 전방 소총중대를 지원하는 형태로 롱돈 산이 수비되고 있었다. 지원 화력은 텀블다운 산의 후사면에 위치하여 사전에 제원기록사격을 완료하였다. 영국군은 완강한 저항을 예상하고, 6월 11일 22시 30분에 제 3 공정대대를 투입하였다. A중대는 아르헨티나군의 방어진지에 은밀히 접근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C중대는 6월 12일 새벽 03:00시에 롱돈 산 북족의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여명공격하였다. 나머지 대대는 5시 경에 서 측방 후사면으로 침투하여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전면방어진지는 야습으로 궤멸되었고, 적은 후방의 1개 중대로 역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아르헨티나군의 방어병력 278명 중 78명만이 철수하였다.
롱돈산과 자매 산, 해리엇 산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 영국군은 텀블다운 산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다. 텀블다운 산은 포트 스탠리로 가는 2개의 접근로를 감제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군은 그 곳에 해병 1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그 중 1개 소대를 주요 접근로에 전진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시키고, 남북으로 연하는 능선 및 계곡에 중대단위로 병력을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모든 포병전력을 텀블다운으로 지향시키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영국군의 당초의 계획대로, 3 코만도 여단과 증원되어온 5 보병여단을 교대하였다. 코만도 여단은 롱돈산 일대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고, 5여단이 초월 공격하였다.
6월 13일 22시경 30분간 공격준비사격 후, 5여단의 스코틀랜드 대대가 텀블다운 산을 공격하였다. 이번에도 영국군은 정면공격과 침투를 병행하였다. 22시 30분 1개 중대가 전방공격을 했으나, 저지되었다. 다른 1개 중대는 다음 날 2:30에 방어진지 전방 목표지역에 전진배치되었던 소대 방어진지를 기습적으로 탈취하였다. 아르헨티나군은 이에 역습하려고 1개 중대를 투입했으나, 오히려 격퇴되었다. 이에 아르헨티나군은 각 중대별로 담당지역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때, 스코틀랜드 대대(-2)는 텀블다운과 윌리엄 산의 중간 지점에서 방어부대의 간격으로 침투하여 텀블다운 산의 측·후방을 기습공격 하였다. 다시 허를 찔린 아르헨티나군은 6월 14일 6:30에 포트 스탠리로 철수해버렸다. 영국군은 공격을 강화시켜 6월 14일 9:00에 최종항복을 받아 내었다.
5. 전쟁 결과
영국군은 256명 전사, 2600명 부산, 함정 17척, 항공기 21대를 손실하여 총 22억 달러가 전비로 소모되었다. 아르헨티나군은 전사 670명, 부상 994명, 생존자 전원인 10951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함정 11척 및 항공기 100대를 잃어서 총 60억의 전비를 소모했다.
6.교훈
정치적 성격 |
군사적 성격 |
비공산권내 블록 대립 선진국 : 개발도상국 대립 구식민제국 : 신생독립국가 대립 영어권 : 스페인어권 대립 |
무기수출국간의 간접전쟁 속전속결전략과 지구전전략 해공군병참선의 확보가 작전성패의 관건 현대식 해상 및 공중전과 재래식 지상전투 소규모특공과 대규모군 대결 |
포클랜드 전쟁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기구의 노력이 무력함을 입증하였으며, 오판에 의한 전쟁발발의 가능성과 전쟁 억지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전쟁이었다. 현대전이라 하더라도 전통적인 전쟁요소와 현대적인 전쟁요소가 배합되어 운용됨을 보여 주었고, 정치, 외교적인 노력이 전쟁의 전투행위와 함께 적절히 조화되어야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한편, 현대적 무기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전쟁의 수행은 인간이 주체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 전쟁으로, 전쟁의 종결은 결국 보명에 의해 쟁취되었음을 볼 대, 우리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보병들의 평소 훈련과 전략, 전술적 발전 노력이 장차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것임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할 것이다.